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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4>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 '조선왕릉'

<기획4>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 '조선왕릉'
삼촌에게 왕위를 빼기고 영월로 쫓겨난 단종, 찬탈한 왕권을 강화시켜 나간 세조
 상조뉴스 편집국기사입력 : 2011-03-13

죽어도 편히 눈을 감지 못한 단종

 

부왕이었던 문종이 오랜 지병으로 승화하자 12세 어린 나이로 조선 제 6대 왕에 올랐던 단종. 삼촌에게 왕권도 뺏긴 것도 억울하지만 죽었어도 바른 양지에도 눕지 못하고 강물에 버림받은 비운의 왕이다.

 

단종은 1452년에 왕위에 올랐지만 한 순간도 편할 날이 없었으며 1455년까지 짧은 재위 기간 동안 세조와 주위 사람들의 눈치를 보면서 지내왔다. 숙부의 무서움 때문에 왕위를 넘겨주었지만 성삼문과 박팽년을 중심으로 한 충신들이 단종의 복위를 꾀하는 일이 일어난 것이다. 일명 사육신(死六臣) 사건으로 충신은 다 죽고, 단종은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되어 죽음의 땅인지도 모르고 영월로 가게 된다.

 

영월에서 쓸쓸하게 지내던 노산군에게 죽음의 그늘이 다가오듯이 한양에서 명을 받고 온 의금부도사가 사약을 들고 왔다. 그러나 차마 사약을 올리지 못하고 있을 때 단종을 모시고 있던 공생이라는 자가 단종의 목을 졸라 북쪽 창문 밖으로 끌어내려 참혹하게 죽이고 만다.

 

세조는 노산군을 강물에 버리고 “만약 누구든지 시신을 수습하면 삼족을 멸한다.”고 어명을 내리게 된다. 하지만 영월의 호장 엄홍도는 지엄한 어명에도 불구하고 냇가에 떠내려가던 단종의 시신을 수습하여 동을지산 지락에 암매장하게 된다.

 

묘가 조성된 언덕 아래쪽에는 단종을 위해 순절한 충신을 비롯한 264인의 위패를 모신 배식단사(配食壇祠), 단종의 시신을 수습한 엄흥도의 정려비, 묘를 찾아낸 박충원의 행적을 새긴 낙촌기적비, 정자각·홍살문·재실·정자(배견정 拜鵑亭) 등이 있다. 왕릉에 사당·정려비·기적비·정자 등이 있는 곳은 장릉뿐인데 이는 모두 왕위를 빼앗기고 죽음을 맞은 단종과 관련된 것들이다.

 

▲ 단종의 장릉

 

장릉의 능침에서 바라보는 첩첩의 전경은 아름답고 장엄하다.

 

1581년(선조14)에 조성된 장릉(莊陵)은 조선의 6대 단종의 능이며 단릉이다. 추봉된 정릉과 경릉의 예에 따라 난간석과 병풍석, 무석인은 생략되었고, 석물 역시 후대에 만들어져서 왜소하면서도 간단하게 되어 있으며 장명등은 사각옥형(四角屋形)이다. 능역 안에 단종에게 충절을 다한 신하들을 배향하는 배식단이 있는 것이 특징이다.

 

1457년 단종이 세조에게 사약을 받고 숨을 거둔 뒤 시신은 영월의 동강에 버려졌으나 충성심 강한 영월 호장 엄흥도가 시신을 거두어 동을지산 기슭에 암매장했다. 그 후 59년이 지난 1516년(중종 11) 여러 사람의 증언으로 묘를 찾아 1516년(중종 11) 12월 15일 봉분을 갖추게 되었다.

 

장릉은 현재 강원도 영월군 영흥리에 위치하고 있으며, 사적 196호로 지정되어 있다.

 

계유정란을 일으켜 조카의 왕위를 찬탈하고 왕권을 강화한 세조

 

어릴 때부터 영특하고 명민하여 학문이 뛰어난 세조는 1417년에 세종과 소현왕후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이름은 유, 자는 수지였다. 어릴 시절에 진양대군으로 봉해졌으나 1445년 세종 27년에 다시 수양대군으로 대봉되었다.

 

대군시절 세종의 명에 따라 궁정내에 불당을 조성하여 승려 심미의 아우인 김수온과 함께 불교 서적 번역을 관장하기도 했으며 향악의 악보정리에도 애정을 쏟기도 했다. 그는 문종 2년인 1452년에는 관습도감도 제조에 임명되어 국가의 실무를 맡아보기도 했다.

 

문종이 승하하고 조카 단종이 왕위에 오르자 왕좌를 보호하는 역할을 맡았으나 1453년 10월 계유정란을 일으켜 정권을 장악한 뒤 1455년 6월 단종을 강압하여 왕위를 찬탈하면서 조선 7대 임금으로 즉위한다.

 

세조는 단종을 상왕으로 모셨으나 다음해인 좌부승지 성상문을 중심으로 한 이른바 [사육신]으로 불리는 관료들이 단종 복위를 계획한 사건이 발각되자 이들을 모두 살해하였을 뿐 아니라 동생인 금성대군을 강화도로 유배 후 죽인 다음 조카인 단종마저 유배지에서 죽이는고 만다.

 

왕권의 강화를 위하여 의정부 서사제를 폐지하고 전제왕권제에 가까운 육조직계제를 단행하는가 하면, 집현전을 폐지하고 경연을 없애는 등 자신의 왕권에 도전하는 세력들을 차례대로 제거하면서 더욱 왕권을 강화시켜나갔다.

 

그 결과 세종 이후 강화되었던 문치는 약화되고 전제독재 정치로 변해버리고 만다. 뿐만 아니라 왕권강화책으로 백성의 동향을 파악하기 위해 태종조에 실시했던 호패법을 복원하였으며, 군제 정비에도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이는 많은 치적을 세워 조선 초기 왕권 확립에 크게 공헌하기도 했다.

 

1460년에는 각 가정을 파악할 수 있는 법전인 호전(戶典)을 복구하고, 다음해에는 형량을 규정하는 형전(刑典)을 개편 완성했다. 한편 군정을 정비하고 각 고을에 명령하여 고을을 지킬 수 있는 무기를 만들도록 하였으며 관제도 대폭 개혁하여 영의정 부사를 영의정으로, 사간 대부를 대사간으로, 도관찰출석자는 관찰사로, 오위진무사는 오위도총관, 병사도절제사는 병마절제사로 명칭을 간소화 시키면서 의무의 효율성을 높였다.

 


이처럼 유래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왕권강화로 왕권을 확립하였으나 세조의 상명하달식의 국정운영이 정국경색을 초래하고 공신들의 권력남용으로 비리는 날로 심해졌다. 한마디로 세조의 정치는 ‘문치대화정치’를 멀리하고 ‘무단강권정치’를 실현했는데 저급한 정치라고 할 수 있다.

 

▲ 세조의 광릉

 

내가 죽으면 속히 썩어야 하니 석실과 석곽을 사용하지 말 것이며, 병풍석을 세우지 말라!

 

광릉은 같은 산줄기에 좌우 언덕을 달리하여 왕과 왕비를 각각 따로 봉안하고 두 능의 중간 지점에 하나의 정자각을 세우는 형식인 동원이강(同原異岡)릉으로서, 이러한 형태의 능으로는 최초로 조영되었다.

 

좌측 능선의 봉분이 세조의 능이며 오른쪽의 봉분이 정희왕후의 능이다. 광릉은 다른 왕릉에 비해 간소하게 조영되었다. 세조는 “내가 죽으면 속히 썩어야 하니 석실과 석곽을 사용하지 말 것이며, 병풍석을 세우지 말라.”는 유언을 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세조의 유언에 따라 이전까지 석실로 되어 있던 능을 회격(灰隔)으로 바꾸어 부역 인원을 반으로 줄이고 비용을 절감하였다.

 

또한 봉분 주위에 둘렀던 병풍석을 없애면서 병풍석에 새겼던 십이지신상은 난간의 동자석주에 옮겨 새기는 등의 상설 제도를 개혁하였다. 능하구역에는 홍살문에서 정자각까지 이르는 참도가 생략되어 있다. 이렇게 간소하게 개혁된 상설제도는 이후의 왕릉 조성에 모범이 되었다.

 

세조의 광릉자리는 원래 다른 사람의 묘자리였으나 풍수상 길지라 하여 묘자리의 주인이 세조에게 바쳤다고 전해지며 일부 풍수가들은 세조의 광릉 자리가 좋아 조선 500여 년을 세조의 후손들이 통치하였다고 전하기도 한다.

 

1468년(예종 즉위) 11월 28일 주엽산 아래 세조를 예장하고 그로부터 15년이 지난 1483년(성종 14) 3월 30일 정희왕후가 승하하자 같은 해 6월 12일 광릉 동쪽 언덕에 예장하였다.

 

광릉은 현재 경기도 남양주시 진전읍 부평리 산100-1에 위치하고 있으며, 사적 제197호로 지정되어 있다.

 

<상조뉴스 편집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