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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릉 중 최초로 한 봉우리에 다른 방을 갖춘 합장릉인 영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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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대왕은 설명이 따로 필요 없을 정도로 정치, 경제, 사회, 문화에 이르기까지 많은 업적을 남긴 왕이다. 뿐만 아니라 세계에서 최고의 문조선왕릉 중 최초로 한 봉우리에 다른 방을 갖춘 합장릉인 영릉.
세종대왕은 설명이 따로 필요 없을 정도로 정치, 경제, 사회, 문화에 이르기까지 많은 업적을 남긴 왕이다. 뿐만 아니라 세계에서 최고의 문자라고 평가 받는 훈민정음을 창제함으로서 후세에 이르러 존경을 영원히 받고 있는 조선 4대 임금 세종대왕.
세종대왕은 1397년에 조선 3대 왕인 태종과 원경왕후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원래 4대 임금 자리는 세종이 아니라 큰 형인 양녕대군이 오른 자리였으나 양녕의 이상한 행동으로 폐세자 시키고 충녕군이었던 세종이 1418년에 왕세자로 책봉이 되고, 같은 해 22세 나이로 임금 자리에 오르게 된다.
세종대왕은 54세로 승하할 때까지 31년 6개월의 재위 기간 동안 많은 업적을 남겼다. 1420년(세종 2) 집현전을 설치하여 유망한 인재를 양성하고, 학문을 진흥하여 유교정치의 기반이 되는 의례와 제도를 정비하였다. 민본 정치를 중요시하였는데, 당대의 가장 큰 업적이라 할 수 있는 훈민정음의 창제 역시 백성들과의 소통을 바라던 세종의 고민이 낳은 산물이었다.
무엇보다 세종의 재위 때 집현전을 빼놓을 수 없다. 집현전은 많은 학자들을 양성했고, 그 학자들이 훈민정음 창제, 과학 기술 개발 등 다양한 분야에서 세종의 업적에 큰 밑거름이 되었다.
영릉은 조선 최초 부부 합장릉
▲ 세종 영릉
영릉은 조선 제4대 임금 세종과 비 소헌왕후의 합장릉으로 조선왕릉 중 최초로 한 봉우리에 다른 방을 갖춘 합장된 능이다. 무덤배치는 국조오례의에 따라 만든 것으로 조선 전기 왕릉 배치의 기본으로 되어 있는데, 1469년(예종1) 여주로 천장하면서 세조의 유명(遺命)에 따라 병풍석을 두르지 않고 난간석만 설치되었다.
봉분 안에는 석실이 아니라 회격(灰隔:관을 구덩이 속에 내려놓고, 그 사이를 석회로 메워서 다짐)하고, 혼유석 2좌를 마련하여 합장릉임을 표시되어 있다. 또한 기존의 왕릉에는 난간석에 십이지신상을 조각하여 방위를 표시하였는데, 영릉은 이를 간소화하여 십이지를 문자로 표현한다.
영릉의 입지는 풍수사상에 따라 주산을 뒤로 하고 산의 중허리에 봉분을 조영되어 있는데, 좌우측에는 청룡, 백호를 이루고 남쪽으로는 멀리 안산인 북성산을 바라보고 있는 게 특징이다.
능의 역사는 1446년(세종 28)에 소헌왕후가 승하하자 당시 광주(廣州, 현재의 서울시 서초구 내곡동) 헌릉의 서쪽에 쌍실의 능을 조영했다. 이 때 오른쪽 석실은 세종을 위해 미리 만들어 놓았는데, 세종대왕이 승하하면서 합장했다. 세조 시대 때 영릉의 자리가 불길하다는 이유로 능을 옮기자는 주장이 있었으나 결국 실현되지 못하다가 1469년(예종 1)에 여주로 이전했다. 여주로 천장하면서 원래의 영릉 터에 있었던 상석, 망주석, 장명등, 문석인, 무석인, 석수, 신도비 등은 그 자리에 묻혔다.
영릉은 현재 경기도 여주군 능서면 왕대리 산83-1에 위치하고 있으며, 사적 제 195호로 지정되어 있다.
왕위에 오른 지 2년 4개월 만에 승하한 문종
문종은 조선이 건국 이래 적장승계의 원칙에 따라 등극한 최초의 임금이다. 29세 나이에 세종이 병들자 부왕을 대신하여 정사를 돌보기 시작하였다. 섭정기간 동안 그는 문무 관리를 고르게 등용하게 하고 언로를 자유롭게 열어 민정파악에 힘쓰는 등 나라의 안정화를 시키는 등 왕위를 이어 받을 준비도 열심히 이어가기도 했다.
세종 32년에 그의 나이 37세 때 이어받았는데, 성품이 너그럽고, 어진 모습에 그야말로 성군의 모습 보였으며 천문과 성리학, 글씨와 시문 등 각 방면에도 통달했다. 하지만 문종은 종친세력의 압력 때문에 왕권이 위축 될 수밖에 없었고, 건강도 좋지 않아 왕위에 오래 있지 않고 2년 4개월 만에 병으로 승화하고 말았다.
문종의 큰 업적은 언관의 언론에 관대한 정치를 펴 이 시대의 언관들의 언론은 정치 전반에 걸쳐 영향력을 키웠다. 세종 말기에 왕실에 의해 이루어진 호국정책에 의해 각종 불교 행사가 행해졌고 궁에 내불당이 조성되어지만 유신들은 막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문종이 즉위하면서 유학 중심의 언관들은 왕실의 불교적 경향을 불식시키기도 했다. 이처럼 문종은 언관의 언론이 활성화가 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언로를 더 넓히는데 힘을 쏟았다.
현릉에는 문종과 그의 비 현덕왕후가 잠들었다.
▲ 문종 현릉
이렇게 왕과 왕비를 한 능에 묻는 경우에는 다양한 양식이 존재하는 현릉은 같은 능에 묻혀 있지만 왕과 왕비의 능을 각각 다른 언덕 위에 따로 만든 능을 “동원이강릉”이라고 한다. 정자각에서 능을 바라보았을 때 왼쪽 위의 언덕에 있는 능이 문종의 능이며, 오른쪽 언덕의 능이 현덕왕후의 능이다.
5대 문종은 왕위에 오른 지 3년 만인 1452년(단종 즉위) 5월에 경복궁 정전에서 승하하였다. 건원릉의 남동쪽에 현릉을 조성하였다. 능지를 정할 때에는 수양대군, 왕보인, 김종서, 정인지 등의 대신을 비롯하여 풍수학랑관이 현지를 답사하고 정하였다. 그의 비인 현덕왕후 권씨는 문종이 승하하기 11년 전에 이미 세상을 떠났다. 1441년(세종 23) 단종을 낳고 위독해져 24세의 나이로 문종보다 먼저 승하하였는데, 안산의 소릉에 장사지냈다.
이후 단종의 복위 사건에 의해 1457년(세조 3) 추폐되었다가 1512년(중종 7) 복위된 다음해 봄, 문종이 묻혀 있는 현릉의 왼쪽 산줄기 언덕에 천장하였다. 사후 72년 만에 왕의 곁으로 돌아온 것이다.
동원이강릉을 조성한 후 정자각을 두 능의 중간 지점으로 이건하였다. 이 때 양능 사이에 소나무가 빽빽하게 있었는데, 능역을 시작하자 저절로 말라 죽어 두 능 사이를 가리지 않게 되었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현릉은 현재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산6-3에 위치해 있으며 사적 제193호로 지정되어 있다.
<상조뉴스 편집국>